컨테이너선에 노트북 수백 대가 실려도, 선장은 이 화물이 불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. 규정을 어긴 게 아니라, 아예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 조항이 있어서죠. 이 조항을 두고 최근 선사들이 국제해사기구(IMO)에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.
문제의 조항은 IMDG 코드의 SP188입니다. 배터리 한 개 용량이 100Wh 이하면 일정 시험만 통과해도 위험물 신고 없이 실을 수 있게 해주는 규정인데요, 시험 성적서는 화주 쪽에 남고 컨테이너 문이 닫히면 표시조차 보이지 않습니다. 선장이 보는 위험물 목록에는 아예 이름이 오르지 않는 거죠.
더 큰 맹점은 이 기준이 컨테이너 전체가 아니라 배터리 한 개당 적용된다는 점입니다. 전기차 배터리 4개를 합친 것보다 많은 전기가 실려도 '면제'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. 알리안츠에 따르면 2025년 선박 화재는 200건 넘게 보고됐고, 상당수가 미신고 리튬이온 배터리와 관련이 있었습니다.
한 번 불이 붙으면 열폭주 때문에 진화도 쉽지 않습니다. 2020년 엑스프레스 고다바리호 화재는 42시간 만에야 꺼졌죠. 배터리 수요가 2030년까지 두 배로 늘어날 거란 전망 속에, 9월 IMO 회의에서 이 규정이 어떻게 바뀔지 지켜볼 대목입니다.
MSC가 제미나이 협력체, 오션 얼라이언스에 이어 수에즈 운하 통항을 부분적으로 재개했습니다. 우선 동서항로 다섯 개 항차부터 시작인데요, 지난주 이달 중 7척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힌 데 이은 후속 조치입니다. 이제 자체 전환을 아직 선언하지 않은 건 프리미어 얼라이언스 하나만 남았습니다. 홍해, 정말 풀리는 걸까요.
다만 프리미어 얼라이언스도 완전히 무관하진 않습니다. MSC의 타이거 서비스에 슬롯을 갖고 있어서, 이 얼라이언스 화물 일부는 이미 수에즈를 지나고 있거든요. 전환은 서비스 단위로 하나씩, 비상 대응 체계는 유지한 채 진행됩니다.
해운 컨설턴트 라스 옌센은 지금 속도면 2026년 말쯤 정상화를 기대할 만하다고 봤습니다. 다만 그 정상화가 '전량 수에즈행'을 뜻하진 않습니다. 항로가 짧아지며 남는 선복을 어딘가에서 흡수해야 해서, 일부 서비스는 계속 희망봉을 돌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입니다.
항로가 돌아와도 남는 숙제가 있습니다. 씨인텔리전스에 따르면 빈 컨테이너는 화물을 싣고 가는 헤드홀 항로보다 약 4.5% 더 먼 거리를 돌아옵니다. 화주 입장에서는 운임뿐 아니라 이 회송 비효율까지 떠안는 셈이죠. 항로는 회복 중이지만, 장비 수급까지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입니다.
최근 글로벌 해운시장에서 약 170만 TEU의 선복이 사실상 운송에 쓰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. 세계 8위 HMM의 전체 선복량이 104만 TEU인데, 7~8위권 선사 하나가 통째로 멈춰선 것과 맞먹는 규모죠. 배는 그대로인데,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.
해운 분석기관 씨인텔리전스(Sea-Intelligence)에 따르면, 팬데믹 이전(2011~2019년) 지연으로 묶이는 선복 비중은 평균 2.2% 수준이었는데, 최근에는 5%까지 올라섰습니다. 트레드링스 항만 혼잡도 인덱스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보입니다. 최근 2주 평균 종합 혼잡도는 46.7점으로 '높음(BUSY)' 단계였고, 물동량 상위 20개 항만은 50.6점으로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.
스케줄 정시성도 팬데믹 이전 70~80%에서 60~65%로 낮아졌고, 한번 늦어진 선박은 평균 5일 이상 밀립니다.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에, 메가맥스급 초대형선 기항까지 늘면서 항만이 짧은 시간에 처리해야 할 화물량 자체가 커진 탓입니다.
⦁ 선복은 그대로, 대기·지연 시간만 늘어나는 구조 ⦁ 정시성 하락 + 지연 기간 증가가 동시에 진행 중
선복 자체는 충분해도, 항만과 스케줄이 발목을 잡으면 처음 받은 ETA는 큰 의미가 없어집니다. 내 화물이 지금 어디쯤 있고 일정이 얼마나 밀렸는지, 앞으로는 이 질문에 얼마나 빨리 답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.